배웠다는 년들이 더 지랄여 글｜박창수 그림｜성주삼 “설날도 지났으니 곧 봄소식이 올 텐데. 왜 그렇게 추운지 모르겄네유” “잠깐여. 보름 지나고 나면 제주도서는 꽃 피었다는 소리 들릴거구먼. 그나저나 올해는 좋은 일들이 많아야 할텐데.” “아이구 나는 우리 애들 회사 잘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유. 요즘 실업자가 하나 둘 여유. 젊은 사람들이 먹고 노는 건 정말 걱정스러운 일인디. 어쩌다 IMF 같은 일이 또 왔나 모르겄시유.” “뭐 세계 경제가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정책 만들고 이끄는 사람들 책임도 있겠지. 하지만 어쩌겠냐구. 앞으로 잘 되길 바라는 것 밖에 없지” “그려유. 누구 욕한다고 해서 당장 경제가 좋아지는 거 아니니까. 그나저나 올해는 소의 해 니까 아마도 좋은 일 있겄지유. 그렇게 믿어보는 수밖에 없지유” “어떻게 되는 겨. 당신 소설 쓰는 거 시작했더니.” “아이구 저이는. 소설 한 작품이 뭐 밥 먹듯이 뚝닥 되는거유. 이제 원고지 한 100매 썼나유. 아직두 멀었시유. 내가 전문작가도 아닌데유 뭘” “그만하면 많이 썼구먼. 나한 테 좀 보여주라구. 나는 쓰지는 못해두 읽는 걸 좋아하니까.” “아이구 됐시유. 당신이 일고 가만히 있겄수. 뭐는 어떻구 잔소리 할 게 뻔한데유 뭘. 말 나온 김에 나는 저 방 가서 글이나 쓸래유. 당신 먼저 자유” 민자씨가 안방에서 일어나자 남편은 갑자기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웬지 아쉬워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민자씨로서는 나이 다 들어 젊었을 때처럼 허구헌날 껴안고 자는 것도 귀찮아졌다. 게다가 설날 이후로 큰 맘 먹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은 보아야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의 뒤로 남편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여왓다. “에구. 참 우리 가문에 저명하신 작가님 한분 나오셨네. 한밤 중인데 잠이나 잘 일이지 그래. 허 허. 참” 남편의 말을 무시한 체 건넌방으로 들어 간 민자씨는 컴퓨터를 켰다. 여고시절에는 글 잘 쓴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지만 40년 넘게 글 하고는 딴 세상을 살다보니 원고 한 줄 두 줄 쓰는 게 여간 곤혹스럽지가 않았다. 간혹 맞춤법도 틀리고 적당한 용어를 찾지못해 한시간을 꼬박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그녀가 지금 쓰기 시작한 장편소설 내용은 가족에 대한 얘기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병실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두고 육남매 자식들이 보여주는 생각과 행동들을 묘사하면서 과연 진정한 효는 무엇인가. 그리고 부모와 자식간의 그 질긴 인연의 끝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말하려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느끼기 시작한 것은 다른 직업은 몰라도 평생 작가로 살라고 하면 못 살 거라는 거였다. 몇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원고를 쓰지만 어느 날은 원고지 다섯줄도 채 못쓰고 이런저런 갈등만 하다 끝나는 것이었다. 그러니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살려고 한다면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소설 파일을 열어 다시 원고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큰 오빠도 작은 오빠도 그렇고 너 신우도 그래. 아들들이 아버지 편하게 모셨으면 왜 이런 일이 벌어져. 안그래요. 올케 언니.” 순정은 둘째 며느리인 김현미를 쳐다보면서 따지듯이 그렇게 말했다. 이쯤에서 그녀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한마디 더 쏟아냈다. “솔직히 말해서 큰 올케가 잘못이지. 알아서 솔선수범하며 잘 모셨어봐. 아랫사람들이 따라하지. 신랑이 대학교수면 먹고 살만한데도 아버지 안모시려고 여행사나 덜컥 차려놓고 말이야. 그리고 막내 올케 자네도 잘한 거 없어. 설령 윗사람들 안한다고 자네도 그래. 아버지 시골집에 반찬 몇 번이나 해다드렸어. 에구 정말 우리 아버지만 불쌍해” 그때 둘째 며느리인 김현미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기가 막혀 . 고모 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요. 딸은 자식 아닌가요.” 병실 밖에서 자식들이 모여 아버지에 대한 책임 공방을 하는 모습을 써내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원고가 막혔다. 자신이 써 놓고 나서 스스로 괜한 책임감 아쉬움 그런 게 밀려오는 거였다. 어느날 갑자기 건강했던 친정아버지가 쓰러지셨을 때 민자씨 그녀도 딸이라는 마치 특권같은 훈장을 무기로 올케들을 나무랬다. 돌아가신 뒤에 눈물 짜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큰소리 쳤고 아들 며느리들 제 역할 한 것 있냐며 화를 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누구 탓할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도 잘 하면 후회는 없지 않다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효도 하는데 아들과 딸이 달라야 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기 전에는 그렇게 배려와 자각, 자기성찰이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을 하는 쪽이다. 어찌됐든 민자씨 다음 줄은 무슨 내용을 써야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그렇다고 민자씨가 애연가도 아니니 마땅히 풀어낼 묘안이나 탈출구가 없었다. 그때 였다. 전화벨이 정적을 깨트리면서 그녀를 긴장케했다. “언니, 나야.” “이 밤중에 무슨일여. 지금 열시 넘지 않았냐” “아이구 몰라 나두. 그냥 속이 상해서 전화했어. 있잖아 우리 시아버님. 또 병원에 입원하신 거 있지. 노인네가 왜 그렇게 병원을 좋아하는 지 모르겠어. 지난번 어지럽다고 해서 병원에 입원해 2주일 있다가 퇴원한 지 한 달도 안됐는데 이번에는 다리에 힘이 없어 걷지도 못하겠다고 난리를 치시는 거야. 게다가 목구멍이 부었다나. 그래서 우리 작은 시누이가 오늘 입원을 시켰다더라구. 어떡해 방금 전에 병원 갔다가 나오는 길이야. 지난번에도 큰집하고 우리집 하고 두 집이서 60만원씩 내놓았잖아. 어휴 내가 못살아. 요즘 장사도 잘 안되는데” 미리부터 병원비 걱정하며 시아버지 흉보는 여동생의 목소리는 수다라도 떨어서 위로 받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민자씨는 그럴 수 없었다. 이제 나이 육십이 되었는데 사돈이나 자신이나 늙어가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민자씨는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얘. 너 돈 걱정 하려면 차라리 너희가 모시든 큰아들이 모시든 모시라구. 니네 시아버님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허전해서 그런 거여. 노인네를 혼자 살게 하니 당연히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 하시지. 작년엔가 마땅한 할머니 있다고 할 때 재혼 시켜드렸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겨. 자식들은 모른다구. 이제 일흔 셋인데 재혼도 못하게 말리구 혼자 살게 내버려두니 그렇지” “어머머. 언니는 그럼 우리가 잘못했다는 거야. 언니 말이 심하다. 대체 언니는 누구 편이야. 어휴 기가 막혀. 우리 매월 30만원씩 생활비 드린다구요. 게다가 우리는 둘째 아들이야. 큰 아들도 안모시는데 내가 왜 모셔. 너무 웃긴다.” 민자씨 듣자하니 더욱 화가 났다. 게다가 남도 아닌 자신의 여동생이니 이참에 단단히 한마디 해야 되겠다 싶어 말했다. “얘. 너는 안늙니, 이 지지배야. 부모 모시는데 딸, 아들, 큰 아들, 작은 아들이 어디 있어. 그냥 모시면 되지. 너 입장 바꿔 생각혀 봐. 10년 전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너두 올케들한테 욕하고 그러지 않았냐구. 너나 나나 며느리지만 반대로 딸이기도 하잖여. 그러니까 시부모라고 할지라도 딸 입장에서 생각 하라구. 그리구 니 시아버님은 혼자서 움직이시구 밥도 챙겨 드시는데 뭐가 힘들어서 혼자 살게 내버려두니. 하루를 살더라도 자식 손자 얼굴 보며 살면 아픈데도 덜 한 거여” 민자씨의 직선적인 나무람에 여동생은 혀를 찼다. 하지만 민자씨로서는 옳은 소리 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 언니는 천사표다. 됐어.” 그러나 민자씨는 오히려 자신이 서운했다. 며느리 둘을 둔 입장에서 만일 자신이 병원에 입원하면 자신의 며느리들도 여동생 같은 생각일까 싶어 갑자기 화가 나고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직격탄을 날렸다. “니가 내 며느리라면 나는 용서 못혀. 전화 끊어 이지지배야. 요즘 배웠다는 년들이 더 지랄여. 그래서 나라가 이 지경여. 불경기 탓할 게 아녀. 인간들 정신 머리 먼저 뜯어 고쳐야지” 여동생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고 그 후로 한 달 넘게 민자씨와 여동생은 서로 통화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며칠전부터 여동생이 시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필자연락처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