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박창수 그림｜성주삼 민자씨는 아침을 먹고 나자 미순이를 안방으로 불렀다. “이모, 왜 무슨 일 있어” 조카라서인지 조금 망설여지긴 했지만 딸이 없는 그녀로서는 여동생 딸이지만 친딸만큼이나 아끼는 조카딸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한마디 하지 않고서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야, 미순아 이모 말을 서운하게 듣지는 말어. 저기 있잖어. 여기는 시골이잖어. 니들 그렇게 쪼그만한 반바지에 맨 소매 티만 입고 다니다가는 벌레에 물리거든. 그것도 그렇구 촌사람들은 다 큰 아가씨들이 그렇게 입고 다니는 거 보면 흉 본단 말여. 그러니까 밖에 돌아다닐 때는 긴 바지로 갈아 입고 위에도 꽉 달라붙는 그런 맨 소매 셔츠는 입지말구 반팔 티셔츠 입어라. 여기는 촌이라서 그려. 알었지.” 민자씨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행여 모처럼만에 놀러 온 조카딸이 기분이라도 나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순이는 의외였다. “하하하 . 왜 이모가 그말 안하시나 했어요. 그렇잖아도 엄마가 시골 내려가서는 얌전하게 입고 다니라고 했어요. 이모도 내가 너무 이뻐서 누가 데려갈까 걱정 되는 거지? 하하하” “그려. 니가 너무 예뻐서 그런다. 요 - 요 깜찍한 것” 잠시 후 미순이와 친구는 옷을 점잖게 바꿔 입고 나오더니 읍네 근처에 있는 봉국사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사실 미순이가 내려온 것은 흥국사에 가서 사진을 찍고 건축물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미대를 다니는데 오래된 건물들을 찾아다니며 건축미에 대한 자료를 만드는 리포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직접 차를 끌고 가는 두 젊은 여자애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민자씨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멋도 부리고 싶고 얼굴에 꽃도 피는 나이니 얼마나 좋을까 ’, ‘ 요즘애들은 어쩜 저렇게 하나같이 키 크고 날씬하고 예쁠까’, 그리고 끝으로는 ‘ 저렇게 예쁘니 남자들이 가만히 있겠나’ 싶었다. 벌써 30년이 넘게 지났지만 결혼 전 이십대 초반에는 명동 나가면 미스코리아 나왔다는 말 여러 번 들었던 그녀였으니 자신의 잘나가던 처녀시절도 떠올랐다. 그때는 남자들이 불쑥 불쑥 나타나 “저기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럴 때 마다 같이 걷던 친구 손잡고 마치 괴한 만난 듯 “엄마야” 하고 소리를 지르면 도망을 치곤했었다. 한번은 도망치다 구두 뒷굽이 보도블록 사이로 들어가 발목을 삐기도 했었다. 나팔바지를 즐겨 입던 그 시절이 그래도 좋긴 좋았다. 먼산을 쳐다보면서 아련한 지난날의 추억 속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덥싹 안아버렸다. 순간 기절을 할 듯 놀라면서 “누구여”하고 소리쳤다. 사람 사는 집 단 두 채 밖에 없는 외딴 산골에 누가 있겠는가? 옆집 영식엄마였다. “하하하- 하하 아이구 아줌니도 뭘 그렇게 놀래유. 아직도 새색시 같이 놀라시네.” “사람두. 갑자기 그러면 놀라지. 오늘 읍네 간다더니 집에 있는거여” “영식아빠 나가는 길에 몇 가지 사 오라구 적어 줬어유. 방금 차 끌고 나간 두 사람 중 머리 짧은 아가씨가 조카딸이지유. 서울 여동생분을 빼다 박었더구만유. 아줌니도 많이 닮구. 아이구 한참 이쁠 때지유 뭐.” “잘도 알아 맞추네. 인물이야 지 애미 닮어서 좋지. 우리 친정 엄마가 고우셨거든. 그려 씨는 못 속인다는 말이 맞어. 그렇지.” “아이구 아줌니 닮었으면 더 예뻤을 걸유. 그나저나 요즘 아가씨들답지 않게 옷도 얌전하게 입었더라구유. 화장도 그렇게 않하는 것 같고” “아이구 그런 말어. 아침부터 내가 한마디 했잖어. 여긴 촌이니까 옷좀 얌전하게 입고 다니라구. 지들엄마가 내 성질 아니까 미리 얘기를 했다고 하더라구. 아이구 나는 요즘 여자애들 옷 홀랑 다 벗고 다니는 거 같아서 못 마땅혀. 내 딸이라면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하지. 속옷만 입고 다니는 것 같다니까” “하하하. 아이구 참 아줌니도. 요즘 시대가 그런걸유 뭐. 텔레비전 보니까 아잖어유. 나는 그런딸이라두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유. 요즘은 딸이 최고라던데. 저나 아줌니나 딸이 없으니 좀 서운하잖어유” “그건 그려. 그래서 내가 우리 미순이만 보면 이뻐 죽겠다니까” 영식엄마와 수다는 한번 시작되면 보통 두세 시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속에 말붙일 사람이라곤 신랑들 뿐인데 남자들은 말수가 적어서 두 여자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말동무가 아닐 수가 없었다. 영식엄마는 영식이의 성적이 시원찮아 그냥 평범한 고등학교 가야한다며 아쉬워했고 영식 아빠 몸이 않 좋은 것 같아 찬바람 나면 보약이라도 한재 해줘야 하구, 친정 엄마 칠순이 곧 돌아오는데 해외여행비에 보태라고 50만원을 내놓기로 했다는 등등 별의 별 얘기를 다 늘어놓았다. 워낙 말할 상대가 없다보니 나이 든 민자씨도 주책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곧 둘째 아들 결혼식 올려야 하는 일, 큰 아들이 승진을 못해 속상하다는 얘기, 미국 간 친정 남동생 연락이 없어서 괜한 걱정이 든다는 얘기 등을 늘어놓았다. 양쪽 집 남자들이 다 읍네에 볼일을 보라 나갔으니 같이 점심 밥 먹을 사람이 없는 두 여자는 민자씨네 집으로 들어가 큰 양푼에 밥을 넣고 그 위에 열무김치 상추 먹다 남은 가지나물 오이 무친 것 등등 몇 가지를 쏟아 넣어 고추장 두 숟가락에 열심히 비볐다. 그리고 깔깔대면서 세 명이 먹어도 남을만한 양을 배터지도록 먹었다. 맛도 있는데다 아까워서 버릴수는 없는 일이었다. 너무 많이 먹었는지 영식엄마는 집에 가서 낮잠이라도 한숨 잔다며 갔고 민자씨 역시 한가하게 콧노래 부르면서 앉아 있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남편의 기침 소리에 잠에서 깬 민자씨는 그만 깜짝 놀랐다. 시계 바늘이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도 집에 손님이 왔는데 저녁을 대충 해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남편에게 키우고 있는 토종닭 한 마리를 잡아달라고 하고 정신없이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섯시 반이 됐는데도 조카딸과 그 친구는 돌아오지를 않았다.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조카딸은 핸드폰도 받지 않았다. 노심초사 기다렸지만 일곱시가 넘어도 연락이 없었다. 정말이지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것 아닌가 싶어 민자씨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산골은 해가 일찍 떨어지기 때문에 외지사람이라면 캄캄하고 좁은 비포장도로를 운전하면서 찾아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자씨는 남편을 불러 차를 몰게 했다. 마냥 기다리고 있을 일은 아니었다. 흥국사까지는 빨리 가면 삼십 여분 거리이니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남편도 두 꼬마아가씨들이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민자씨 부부는 둘다 걱정에 휩싸여 아무말이 없었다. 읍네에 들가기 전에 마지막 모퉁이 길을 돌아설 때였다. 어둠이 내려앉는 산길은 적막하기만 한데 갑자기 20여미터 앞에 차 두 대가 서 있었다. 하나는 조카딸이 타고 간 차였고 조카딸과 그 친구는 차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 차 앞에는 젊은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민자씨네 차가 앞으로 다가서도 녀석들은 그대로 서 있었다. 갑자기 흥분한 민자씨 남편은 차를 세우고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당신들 누구야. 누군데 지금 차를 막고 뭐하는 짓이야.” 두 남자는 당황스러운 듯 아무말도 못하고 한발짝 씩 물러났다. 그러자 민자씨 남편은 더욱 당당하고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니들 내가 누군지 알아. 어디서 감히 남의 집 귀한 딸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거야. 응” 마치 귀뺨이라도 때릴 듯 앞으로 다가서자 조카딸이 차에서 내리면서 뛰어왔다. “이모부. 저기요. 있잖아요. 그러니까” 남편은 정신없이 말을 이었다. “아무일 없어. 다친 데는 없지. 저 녀석들이 무슨 짓을 하거야” 남편은 팔을 걷어 부치고 거의 싸움을 하기 직전의 단계였다. 하지만 큰 실수였다. “이모부 그게 아니구요. 우리 차가 고장 나서 저 아저씨들이 고쳐줬어요. 다 고쳐주고 막 서로 인사하는 참이었는데 ......,” 조카딸의 말에 남편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민자씨는 그제서야 자신이라도 사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구 이일을 어쩐대유. 아저씨들 미안해유. 우리 조카딸이 연락이 안돼서 걱정을 하던 끝에 그만....., 우리 집 양반도 본래는 조용한 분인데 워낙 긴장했던 터라서 그래유. 아이구 미안해유 . 늦었는데 어서들 가셔유” 조카딸도 그제서야 한마디 거들었다. “어머 정말 죄송해요. 저희 이모부가 저희 찾으러 나오시다가 그만 오해를 ...... 정말 감사하고 죄송해요. 조심해서 가세요.” 집에 돌아오자 민자씨와 남편 조카딸과 그 친구는 닭도리탕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너무도 황당했던 그 사건을 다시 이야기하며 한바탕 웃었다. 그때 민자씨가 조카딸에게 나무라듯 한마디 했다. “미순아 너 왜 전화는 않받았어” 그제서야 조카딸은 깜짝 놀라더니 애교를 떨며 말했다. “이-모 절에서는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놓는 게 예의잖아요. 그래서 전화 오는 걸 몰랐죠. 어머 제가 에티켓을 너무 잘 지켜서 문제라니까요.” 그러자 네 사람은 또다시 한바탕 웃어댔다. 그러자 그 웃음소리에 여름 더위가 놀라서 떠나고 있는 지 찬바람이 살포시 불기 시작했다. <필자연락처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