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린? 바르셀로? 글｜박창수 그림｜성주삼 “요즘 환갑잔치 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다구 그려. 엉뚱한 생각 말구 와서 밥이나 해 먹구 올라가.” “그러면 어머님 여행이라도 다녀오세요. 어르신들 요즘 중국이나 동남아 많이 가시잖아요. 그래도 그냥 지나가기에는 섭섭하잖아요” “아이구 그런 말 말어. 내년쯤에 우리 동갑계에서도 간다구 했으니까 괜히 헛돈 쓸 생각 말어. 그럴 돈 있으면 니들 집 사는데 보태야지. 서울은 집 값이 너무 올라서 걱정이다.” 꽃 피는 사월이 왔건만 민자씨 마음은 낙엽 지는 10월이 따로 없었다. 어느새 남편의 예순번 째 생일이 한 달 반 앞으로 왔으니 늙어가는 게 실감이 났다. 며느리는 뷔페에서 환갑잔치를 해드리겠다고 했지만 민자씨 부부는 거절했다. 칠순때나 가서 할 생각임을 밝혔다. 여행도 그렇다. 부부가 함께 여행을 가려면 젖소를 책임져줄 사람이 필요한데 한 두 마리라야 영식이네 한테 부탁이라도 하지 30두가 넘는 젖소를 누가 4박5일간 챙겨줄 수 있겠는가? 사람을 사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중으로 돈을 써 가며 여행을 다녀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누구인들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즐겁게 얘기하고 놀고 오는 여행을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돈을 생각하고 일을 생각하다 보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30년 넘게 목장을 지켜오다보니 부부가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었다. 민자씨 남편의 축산업에 대한 사명감은 감히 누구도 못 따라올 만큼 강직하고 투철한지라 당일치기 국내 관광도 이들 부부에게는 가뭄에 콩 나듯 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해외여행 가자고 남편을 조를 만큼 민자씨 철 없고 바보 같은 여자가 아니었다. 민자씨 생각을 이렇다. 칠순 때는 반드시 잔치를 해야 하고 여유가 되면 유럽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었다. 다만 이번 환갑때는 가까운 친척들하고 조용하게 밥 한 끼 해먹는 것으로 넘어갈 작정이었다. 며느리의 전화가 온지 이틀 만에 이번에는 시누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니, 오빠 환갑 얼마 않남았잖수. 어디서 하시려구요” “아이구 환갑은 무슨. 요즘 환갑잔치 안하는 사람들이 더 많던데.” “어머어머. 언니, 그래도 먹고 산다는 사람들은 뷔페에서 다 해요. 잔치가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데서 식사는 해야지요. 그리고 여행도 다녀오구요.” “아이구. 고모는 우리 사정 뻔히 알면서 그려유. 젖소 때문에 여행 못가잖아유. 그리구 아직 애들 집도 장만 못했는데 뷔페에서 잔치를 해유. 돈만 쓰게.” “언니 그런 말 말아유. 돈 걱정이라면 우리들이 낼께유. 아 인생에 한번 돌아오는 날인데 그래. 나중에 후회해유. 내가 둘째오빠하구 상의 해가지구, 애들하구 돈 같이 내서 해드릴께. 여태 시골서 젖소만 키우며 몇 십년 세월 보내구 환갑도 제대로 못 얻어 잡수면 그게 말이 되냐구. 언니.” 남편에게 며느리와 시누이의 전화이야기를 했더니 남편 역시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니 집에서 조용히 보내자고 했다. 역시 오랫동안 같이 살아온 덕에 생각이 맞았다. 하지만 이제 옆집 영식이 엄마까지 나서서 바람을 불어넣었다. 몇 십년간 목장 지켜왔으면 이제 남들 보란 듯이 멋지게 여행도 한번 다녀오고 그래야 후회 없는 인생을 사는 거라고, 잔치는 않하더라도 여행만큼은 다녀와야 한다고 부추겼다. 자기 친구 남편이 여행사를 운영하는데 항공권을 싸게 구입할 수 있으니 언제든지 말만 하라고 했다. 게다가 자기네가 피는 달라도 십여년을 함께 이웃해 살아온 만큼 형제나 다름없다면서 항공권 구입할 때 삼십 만원은 보태겠다는 게 아닌가? 주변사람들이 이럴수록 오히려 민자씨는 부담만 커졌다. 그래도 흔들릴 수는 없었다. 처음 생각한대로 집에서 밥이나 해먹는 게 조용하고 뱃속 편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서울 시동생 시누이 그리고 두 아들이 합세를 하여 뭔 일을 꾸미는 지 그 후로는 통 전화도 없었다. 한달이 체 남지 않았는데 그녀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루는 읍네 슈퍼댁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읍네에 큰 약장사가 들어왔는데 가수도 오고 쇼도 하고 그러니 구경삼아 한 번나오라는 거였다. 마음도 심란한데 차라리 시장도 볼겸해서 읍네로 나갔다. 봄 들어 밥맛이 없어하는 남편을 위해 조기 한 두루미와 김, 오징어젓갈 등을 사고 슈퍼댁을 만나 약장사들이 무료로 공연을 하는 00예식장 건물로 갔다. 읍네 여자들은 다 모인 듯 행사장안은 발 디딜틈 없이 여자들로 북적이는데 다행이도 동갑계원하나가 자리를 미리 맡아놓았던 터라 민자씨는 앉아서 공연을 보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민자씨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이벤트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주부퀴즈대회였다. 1부는 가수들이 공연을 하고 2부는 신청자 5명을 대상으로 퀴즈대회를 열어 1등에게는 동남아 여행권을 준다는 거였다. 정보를 입수한 민자씨 기회는 바로 이거다 싶었다. 자신이 동남아여행권을 받게 되면 남편 환갑 때문에 친적들이나 주변사람들이 신경을 쓰지 않게 할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래도 학창시절에는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민자씨 용기를 내어 신청접수를 했다. 물론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떨려왔다. 드디어 퀴즈대회가 시작되었는데 나머지 네 명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삼십대인 양 젊어보였다. 어찌 보면 민자씨가 무리한 도전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할머니 소라듣는 아줌마 중에서도 늙은 아줌마가 아닌가? 첫 번째 문제가 사회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예로부터 이 고을 두고 청풍명월이라고 했습니다. 최근에는 청결고추로 유명한 이 곳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문제가 끝나기도 무섭게 참가번호 1번 여자가 “괴산” 하고 답했다. 그러자 그녀를 응원나온 아줌마부대가 큰소리로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는데 그만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2번 3번 문제도 나란히 그 여자가 잇달아 정답을 맞추면서 여유있게 선두를 달렸다. 민자씨는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나온 거 망신을 당해서는 안되니 제대로 해보자고 두주먹을 불끈쥐었다. “유신정권 시절인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이 운동이 한창 벌어졌습니다. 잘 살기위한 운동으로 농어촌...” 민자씨 문제 설명 도중 손을 들었다. “새마을운동.” 드디어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다음 문제는 가정생활에서 주부들이 알아두면 좋은 상식입니다. 주방 하수구에서 냄새가 날 때 이를 제거하는 방법 두 가지만 말씀하십시오” 역시 살림 오래한 민자씨에게 유리한 문제였다. “식초를 얼려서 개수통 구멍에 넣어두면 되고 또 한 가지는 소금물을 팔팔 끓여서 세재와 혼합한 후 부어주면 좋습니다” 이쯤 되자 방청석에 있는 슈퍼댁과 동갑계원들이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면서 손을 흔들었다. 40여 분 간 지속된 퀴즈에서 민자씨와 초반전에 잘 맞춘 젊은 여자가 70대 70으로 공동선두를 달렸다. 드디어 심장 떨리는 시간이 다가왔다. 마지막 한 문제를 두 사람 중 누가 맞추느냐에 따라서 1등이 탄생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문제가 흘러나왔다. “외국의 도시 이름입니다. 이 도시는 스페인에 있으며 천재건축가 가우디가 수많은 건축물을 남겨 놓은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는데 그때 우리나라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따기도 했지요. 어디일까요?” 민자씨 떠오를 듯 말 듯 하는데 ‘바르’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 뒷말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경쟁자인 젊은 여자도 아직 손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방청석에서 뭐라고 떠들자 사회자가 경고를 주기도 했다. 민자씨 안되겠다 싶어 용기있게 말했다. 말이란 이미 뱉어내면 주워 담을수 없는 법이고 퀴즈대회이니 정답이 아니면 동남아여행권은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이때 민자씨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바르셀린, 아니 바르셀로...” 방청석에서는 배꼽을 잡고 웃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로 뒤를 이어 젊은 여자가 말했다. “바르셀로나입니다.” 결국 민자씨는 힌트만 주고만 셈이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민자씨는 망신스러워서 얼굴을 숙인 체 ‘걸음아 나살려라’ 하며 정신없이 행사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이 사실을 남편은 모를 테니 그나마 안심이었다. 그날 저녁 민자씨는 밥 생각도 없었다. 창피스러웠던 일을 기억하면 한숨만 나왔다. 상품권에 눈이 멀었던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남편은 어디 아프냐며 물었지만 민자씨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열시가 넘은 시간인 것 같았다. 전화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서울 시누이였다. “언니, 둘째오빠하고 큰 조카가 뷔페 책임지기로 했고 3박4일 태국여행은 나하고 작은조카가 돈 내서 예약했어요. 그러나 우리가족들끼리 서울 뷔페서 저녁 먹고 그날 밤 비행기로 여행가시면 돼요. 집에 젖소들 걱정 마세요. 작은 조카가 여름휴가 당겨서 쓰면 된데요. 아셨죠?” 민자씨 너무 감동스럽고 고마워서 그만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런데 그 다음 시누이 말이 그녀를 그야말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만들었다. “언니, 우리가 알아서 해드린다고 했잖아요. 뭐가 그리 급하셔서 퀴즈대회는 나가셨수. 우리 친구 영신이가 전화왔던구먼. 어니 2등 했다면서. 바르셀린이 뭐야. 그러니까 이런기회에 외국여행좀 다니셔요. 하하하.” <필자연락처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