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하고 싶은 거 하며 살거예유 글｜박창수 그림｜성주삼 “ 잘하셨어유. 애들이 말은 잘 들어유” 읍내 중학교에 ‘청소년 우유소비촉진을 위한 1일 명예교사’ 부탁을 받아 한 시간 동안 강의를 하고 집에 도착하여 신발을 벗는 순간이었다. 형식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왔다. 민자씨 난생 처음으로 한 시간 동안 강의를 한 결과는 한마디로 ‘너무 힘들다’는 것 이었다. 군청 축산계장이 사정하다시피 부탁을 해서 얼떨결에 하게 되긴 했지만 강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님을 그녀는 실감했다. “어휴 말두 말어. 한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아주 혼났다니까. 아이구 선생들은 날마다 애들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몰라.” “선생님들이야 직업이잖어유. 그래두 아줌니는 참 대단하셔유. 나는 죽으면 죽었지 애들 가르키는 건 못할 것 같어유. 무슨 얘기 하셨어유. 칠판에 뭐 쓰고 그러셨어유” “아이구 그냥 대충했어. 우유가 몸에 좋은 이유하구 청소년들 건강에 우유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뭐 그런 얘기 한 이십분 하구 십분은 우리 목장 얘기 좀 하구 또 이십분은 학생들한테 질문 받구 뭐 그랬어.” “어머. 아줌니 그냥 술술술 나오시네유 . 그거 아무나하는 거 아녀유. 우리 조카 지집애가 올해 대학 졸업반 이거든유. 그애두 봄에 교생실습 나갔었는데 그때 애들한테 얼마나 질렸는지 선생은 죽어도 않한다고 하더라구유. 요즘 애들이 워낙 극성스럽고 지 잘 난 맛에 사니까. 아이구 우리 형식이는 학교 가서는 잘하는지 몰라유” “아 참 형식이 학교서 봤어. 강의 끝나구 교감선생님하구 1층으로 내려오는데 누가 인사를 꾸벅 하는 겨. 보니까 형식 이더라구. 내가 교감선생님한테 말 했어. 우리 조카 라구. 나는 애들이 워낙 많으니까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다라구. 내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애들이 장난은 들하더라구. 교감 선생님두 계셨으니까” “아휴 여하튼 축하드려유. 이젠 강의도 하시구. 아줌니는 공부좀 더 하셨으면 뭐래두 하셨을텐데” 난생 처음 하는 강의여서 조금 떨리긴 했지만 민자씨는 준비해간 내용을 어느 정도 제대로 전달했다는 생각에 마음은 흐믓했다. 사실 뭐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었다. 자연치즈 만드는 법, 우유 마시는 요령과 하루적정 음용량, 우유의 유당과 충치, 젖소 사육과 관리요령 등은 이십년 넘게 젖소를 키워온 그녀로서는 상식적인 수준의 내용이었기에 긴장만 하지 않으면 쉽게 설명할수 잇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영식엄마가 한 말이 자꾸만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지난 8월에 있던 명예교사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더라면 더 멋지게 강의를 할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았고 또 한 가지는 여고시절 한동안 꿈꾸었던 교사에 대한 꿈이 떠올랐던 것이다. 교대에 입학해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아래로 넷이나 되는 동생들 때문에 그녀는 꿈을 접고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가 직장생활을 해야만 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시월의 밤은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옛 추억과 인생의 무상함으로 몰고 갔다. 코를 골며 자는 남편에게는 관심조차도 없었다. 민자씨 여고시절은 화려했었다. 시골 여학교지만 천명가까이 되는 여학생중 전교회장 이었고 공부는 전교 1등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반에서 5등 안으로는 꼬박꼬박 들었다. 훤칠한 키에 남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얼굴과 몸매를 자랑했던 그녀였다. 당시 편지를 주고받던 남학생은 훗날 소식을 들으니 대기업에 들어가 상무가 되었다고 했다. 희색 바바리코트를 입은 멋진 남자와 가을 낙엽을 밟으며 사랑을 하고 여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던 40여 년 전의 여고3년생 오민자는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취업 때문에 이른 나이부터 서울생활로 고생만 해야 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니 은근히 화가 났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남편을 만난 것은 꽃다운 처녀시절을 너무 일찍 막 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술이라도 한잔 들이키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잘 마시기만 한다면 나이 들어 누구 눈치보지 않고서 생각날 때마다 한 두 잔 할 수도 있지만 속에서 받지를 않아 술 마저도 그녀를 위로해주지는 못했다. 열두시가 넘었는데 잠은 오지 않고 머리만 아파왔다. 그렇다고 한밤중에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수도 없는 일이었다. 순간 민자씨 충격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데 다름 아닌 흡연이었다. 언젠가 일찍이 남편을 잃고 애들 혼자서 키워낸 친구에게서 너무 외롭고 힘들어 담배를 배웠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그녀는 한번 피워보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비어있는 건너방으로 간 민자씨는 예전에 아들이 피우다 놓고 간 담배를 서랍에서 꺼냈다.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는 심정이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다. 생각처럼 담배는 잘 빨리지가 않았다. 한 모금 두 모금 빨다 숨을 내쉬었으나 남들이 피울 때 처럼 멋지게 연기가 뿜어 나오지도 않았고 아무 맛도 없는 듯했다. 그래서 세 번째는 있는 힘을 다해 깊이 빨아보았다. 순간 가슴이 탁 막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목에서는 기침이 나왔고 눈에서는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담배마저도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내일모레면 나이 육십이 다 되는데 이제 와서 옛 시절 그리워하고 억울해 하며 혼자서 어둠속을 헤메고 있는 듯한 자기 자신이 너무도 야속하기만 했던 것이다. 행여 남편이 깰까봐서! 숨을 죽여 가며 울었던 민자씨. 이튿날 아침이 되자 그녀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고 여느 때처럼 아침을 먹은 후 남편을 따라다니며 축사 일을 거들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남편과는 갈수록 말이 줄어들었다. 몇 십 년을 그렇게 둘이서 바늘과 실처럼 붙어 있었으니 이제는 말보다 눈빛이나 표정으로 더 통할 정도가 된 사이가 아닌가. 축사 바람막이를 보수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마침 남편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둘다 밖에서 일하고 있으니 전화가 핸드폰으로 온 것 같았다. “ 아이구 안녕하세유. 어쩐 일이셔유” “................” “아, 그래유. 좋게 봐주시니까 그렇지유 뭐. 그나저나 본인생각이 어떤지 모르겠네유. 생각해보고 이따 전화를 드리라고 할께유. 예” 남편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전화를 받더니 의외로 간단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민자씨를 향해 말했다. “아이구 오여사 축하드려유. 군청 축산계장인데 어제 문의중학교 가서 명예교사로 강의한 게 아주 잘했다고 앞으로 계속 우리군 우유 1일 명예교사로 활동을 해달라는구먼. 이젠 학교로 행사장으로 유명강사가 되어 활약을 하셔야겠네 . 허 - 허” 순간 민자씨 놀랍기도 했지만 너무 반가운 소식이었다. 소녀시잘 꿈이었던 초등학교 교사는 아니더라도 어찌됐든 여기저기 강사로 나가 강의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옷을 한 두벌은 사야 될 것 같고 화장도 조금은 해야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너무도 즐거운 민자씨. 그러나 이런 민자씨의 봄날 같은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남편이었다. 남편의 한마디 말은 그야말로 촌철살인(寸鐵殺人)이었다. “강사가 흡연을 하면 교육생들이 좋아할까 모르겠네” 낮엔 새가 듣고 밤엔 쥐가 듣는다더니 자는 줄만 알았던 남편은 간밤에 있었던 일을 다 알고 있는 게 아닌가? 민자씨 딱히 대응할 변명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흥, 나도 이젠 하고 싶은 거 하며 살거유”. <필자연락처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