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박창수 그림｜성주삼 “저 싸가지 없는 놈, 박살을 내야 혀.” 토요일 아침 민자씨 눈앞에 친정시골에 살아계신 큰어머님 모습이 어른거렸다. 친정 부모님들은 이미 다 돌아가셨지만 올해 여든 일곱 된 큰어머님은 정정하신 편이다. 말이 큰어머님이지 친정엄마 돌아가신 후로는 엄마나 다름없는 분으로 여기며 살아온 터라 정이 각별했는데 어찌하다 보니 지난해 봄에 찾아뵌 후로는 못 찾아뵙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큰어머님 생각이 간절했다. 아무래도 저녁에는 전화라도 걸어볼 생각이었다. 낮에 큰어머님이 눈에 어른거린 것은 꿈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일이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 네시쯤 되었는데 남동생으로부터 전화 한통화가 걸려왔다. 서울에 계신 고모부가 돌아가셨다는 거였다. 민자씨 친정고모부로 말할 것 같으면 ‘천사표’ 그 자체였다. 60년도에 시집을 간 고모는 서울에서 살았는데 친정조카들은 서울만 갔다면 의지할 곳이 없으니 자리를 잡기 전에는 고모네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곤 했다. 민자씨 역시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서 6개월 정도를 고모네집 신세를 져야 했다. 미아리 달동네 판자집 그것도 방두칸짜리 집이었다. 눈이 많이 오거나 비가 내리면 천정에서 물이 떨어져 통을 방 한구석에 놓고 살아야 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인데도 시골에서 조카들이 올라오면 두 딸들이 쓰는 방 한 칸을 아예 내주거나 함께 쓰도록 했다. 고모야 피붙이이니 그런다 쳐도 고모부는 처가 식구들이 한둘도 아니고 자그마치 일곱명이나 거쳐 갔으니 없는 살림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가 있다 자리 잡아 떠나면 다시 다음 녀석이 찾아오고 그렇게 20여 년간 반복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착하디 착한 고모부는 싫다는 기색 한번 없이 오히려 “고모부가 잘 살지 못해서 편하게 있게 못해줘 미안하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보일러공으로 늘 힘든 일을 하며서도 가족들에게 화 한번 내는 것을 보지 못했던 고모부였다. 삼남매 다 대학을 졸업시키고 자리잡고 살게끔 해주시고는 이제 일흔 한 살인데 세상과 작별을 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민자씨는 전화를 받자마자 곧장 옷을 챙겨 입었다. 축사에서 일하던 남편을 불러 소식을 알리고 자신은 곧장 올라가겠으니 남편은 내일 낮에 잠깐 올라왔다 내려가라는 말만 남기고 성북구 미아리 근처의 한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서운하지만 자식들 때문에 그런 감정도 표현하지 못한 채 허전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고모를 보자니 그만 눈물이 쏟아졌다. “아이구, 고모 우리 고모 어떡해. 이제 칠십인데. 우리 고모부님 더 사셔야 하는데.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우리 고모부님을 데려가다니. 이럴 수가 없어. 아이구 고모 어쩌면 좋아. 어엉 엉 엉 ......,” 고모부 영정을 보자니 지난날들이 스쳐갔다. 서울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촌년이 추운겨울에 직장에 다니기 위해 검은 코트를 입고 큰 가방 하나 들고 고모집을 찾아왔을 때 고모부님은 먼 곳에서 오느라 고생했다면서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달려 나와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셨다. 출근할 때 버스는 몇 번을 타고 가야하며 아침에 반찬은 없지만 밥 해놓고 찌게는 늘 끓여 놓으니 고모 고모부 새벽일 나가더라도 꼭 밥 챙겨먹고 회사가라는 당부를 아끼지 않으셨다. 조카들이 그렇게 자주 꼬리를 물며 고모집을 찾아가 신세를 지닌 것도 이런 고모부의 편안한 미소와 따뜻한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동생들 그리고 사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밤을 보냈다. 11시까지는 아들과 사위들 직장 사람들의 조문이 이어졌지만 밤이 깊어지자 남아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 친척들 이었다. 모두들 ‘우리 고모부 참 좋은 분이셨다’고 회상하면서 혼자된 고모님을 붙잡고 건강을 당부하면서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허무하고 슬픈 일이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주 한 두잔 씩 걸치다보니 하나둘씩 조문객 식당 바닥에 그냥 드러누워 잠에 떨어지곤 했다. 하지만 술을 좋아하지 않는 민자씨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장례식장 휴게실은 웬만한 로비 이상으로 깔끔하면서도 안락하며 고급스러운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특실 이용료가 하루 200만원이라니 시설이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시골사람들도 상을 당하면 시내 장례식장으로 가기 시작했으니 이제 도시의 장례식장은 결혼식장의 수준을 뛰어넘는 듯 했다. 장례식장 마저 럭셔리 문화를 이어받은 것이다. 떠나는 분을 위해 좋은 시설을 갖추는 것도 좋지만 너무 고급스러운 이미지에서 이질감만 느껴지기도 했다. 죽어서 아무리 좋은 식장으로 오면 뭐하겠는가. 살아생전에 하고 싶은 것다 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후회없이 사는 게 중요할진데 살아생전 고생만하다 저승 갈 때 하루 이틀 고급스러운 식장에 있다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시간이 3시가 넘었는데도 휴게실에는 원형 쇼파 5개가 다 차있을 정도로 적지 않았다. 한층에 조문실이 서너개씩 되다보니 그런 것 같았다. 민자씨 갑자기 자신도 조금씩 세상을 등지게 될날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어느새 56세가 되고 보니 환갑잔치 할 날이 5년밖에 않남았고 70되는 날도 불과 14년밖에 남지 않은 셈이었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을 빼 마시면서 온갖 잡다한 생각을 다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인생이란 이렇게 왔다 가는 걸까. 등등...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묘했다. 그렇게 복잡하고 허무한 생각을 하던 그녀가 갑자기 눈이 동그랗게 떠지면서 이상한 느낌을 갖는 게 아닌가. 어느새 그녀는 자신이 앉은 원형 쇼파에 한사람 앉을 자리정도를 띄운 옆자리에 중후한 중년남성이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남자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는데 검은 양복과 흰 와이셔츠가 적당히 희끗해진 단정한 머리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왕년의 미남 배우들의 멋진 모습보다도 훨씬 세련되고 잘나보였다. 민자씨는 갑자기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면서 속으로 그랬다. “내가 미쳤지. 열 여덟살 처녀도 아닌데 왜 이러는 겨. 주책스럽게. 게다가 고모부님 돌아가신 장례식장 와서 남자를 보고 가슴설레이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봐” 이런 민자씨 가슴을 그나마 잡아준 것은 텔레비전이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텔레비전 화면을 보자 동계올림픽 쇼트랙 결승전이 열리고 있었다. 한국 2명 미국 중국 캐나다 각각 한명씩 이렇게 다섯명의 남자들이 1000미터 결승경기를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여기저기서 응원의 소리가 들려왔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그녀는 아니지만 미국의 그 문제아 같은 ‘오노’가 함께 결승을 치룬다기에 민자씨는 눈여겨보았다. 속으로 그랬다. “요놈의 자식 이번에는 꼴찌를 해서 망신을 당해야 하는데.” 경기가 시작되고 휴게실의 사람들은 저마다 잔뜩 긴장한 채 한마씩 던지긴 했지만 장례식장이라선지 흥분된 어조는 극도로 자제하는 눈치였다. 그녀 또한 가슴을 조이면서 화면을 바라보는데 선수들이 한바퀴씩 돌때마다 그야말로 심장마비라도 걸릴 듯 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옆에 그 엄청난 미남이 앉아있으니 그녀의 가슴은 다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두 바퀴를 남겨 놓자 한국 선수들이 앞으로 치고 나왔다. 그러자 오노라는 녀석도 바짝 뒤따라 붙었다. 마지막 한바퀴 한국선수가 1, 2위를 달리는 오노라는 녀석 2위를 달리는 한국선수의 허리를 미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그 순간 자칫하면 선수들이 넘어져 누가 1위를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민자씨는 화가 잔뜩 나 있는데 다행이도 한국선수들이 1, 2위를 차지하고 오노는 3위를 했다. 방송에서 경기상황을 전하던 아나운서들의 목소리에 흥분이 가득해질 무렵 민자씨 역시 너무 흥분해서 입 밖으로 말이 터져 나온 게 아닌가? 그런데 그 말은 시골아줌마의 무식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었다. “저 싸가지 없는 놈은 저렇게 박살을 내야 혀. 에이 속이 다 후련하네 그냥” 그러자 주변사람들이 다 그녀를 쳐다보았고 어떤이는 박수를 쳤는가하면 다들 50대 여인의 입에서 나온 과감한 말에 놀라움과 즐거움을 그대로 드러냈다. 더 큰 일은 옆에 있던 멋진 중년역시 그녀를 보면서 놀란 표정을 있는 게 아니가. 민자씨 갑자기 창피스러워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화장실로 도망을 갔다는 거 아닌가. 필자연락처 : ☎ 019-609-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