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나라 ` 국민이 아닌가 보다 - 농민과 난민, 그리고 한미FTA 고 병 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추장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 아주 임박한 것처럼 보인다. 지난 7차 협상을 끝내고 미국의 웬디 커틀러 대표는 ‘가장 성공적인 협상이었다’고 만족해했고, 한국의 김종훈 대표도 ‘4월 초 협상 타결’을 전망했다. 최근 SBS의 여론조사(2.14)에서는 국민의 50% 정도가 협정 체결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반대 여론을 근소하게 앞질렀다. 어느 경제평론가의 말처럼, 국민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한미FTA를 ‘관세 좀 깎아 물건 많이 팔자는 협정’으로 잘못 알고 있다. 정말이지 우리 물건 팔기 위해 미국 물건 몇 개 사주는 게 문제라면 차라리 사주겠고, 협정을 지지하고 있는 50%의 국민이라도 부자가 된다면 그렇게 하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한미FTA는 상품 장벽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사회 기본 골격을 바꾸는 협정이고, 국민들 상당수를 구조조정의 희생자로 내몰게 되는 협정이다. 이제 협상은 끝나 가는데, 우리의 ‘무지’가 여전히 우리의 적으로 남아있다. 작년 언론에서 찬반토론이 활발했을 때만 해도 반대 비율이 높았다. 그러나 방송에서 토론이 사라지고 신문에서 반대 의견이 사라지면서, 그리고 국정홍보처와 ‘한미FTA체결지원위원회’의 광고만이 최면술처럼 반복되면서, 국민들은 어느덧 자기 문제가 흥정되는 협상 테이블을 무심하게 보고 있다. 지금의 싸움은 ‘의견’과 ‘의견’의 다툼이 아니라, ‘의견’과 ‘의견없음’의 다툼이다. 국민들은 생계에 쫓겨 자기 생계를 좌우할 협정에 무관심하고, 정부는 살 길인지 죽을 길인지 모를 그 길을 따라 오라고만 난리다. 지난 주 종묘에서 한미FTA 체결에 반대하며 삼보일배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그러나 경찰은 몇 달 전 농민들의 과격 시위를 핑계 삼아 그것을 불허했고, 수천 명의 경찰이 수십 명의 참가자들을 겹겹이 에워 싸버렸다.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경찰 스피커 소리에 묻혀버렸고,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경찰 버스에 가려져 버렸다. 그 자리에 있던 나는 마치 난민이 된 느낌이었다. 이 나라, 이 도시에 있으면서, 이 나라 이 도시에서 추방된 느낌을 받았다. 그 날 밤 뉴스를 보니 농민들이 명동거리에 풀어놓았다는 염소와 돼지가 꼭 우리 모습이었다. 그것들은 ‘한미FTA 반대’ 띠를 두르고는 도심 한 복판에서 난민처럼 떠돌다 경찰들에 끌려갔다. 난민이란 국가를 잃은 사람들, 혹은 국가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1997년 이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은 채 난민처럼 떠돌고 있다.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있고 농민들은 농촌에서 쫓겨나고 있다. 800만 명의 비정규직과 300만 명의 농민들. 지난 십 년간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이들은 모두 삶의 뿌리가 뽑힌 채 이곳저곳을 전전하거나 전전할 운명이 되었다. 지난 십 년간 이들에게는 자신들을 보호해줄 정부도, 정당도, 정치인도 없었다. 정부는 오랫동안 ‘전체’를 위해 ‘일부’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말해왔다. “무역해서 먹고 사는 나라에서 농민이 희생할 수밖에 없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결국 잘 사는 나라이니 노동자가 희생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로 자신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합리화 해왔다. 그것이 결국에 농민에게도 노동자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희생해야 할 그 ‘일부’가 너무 많아지면서,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너무 길어지면서, 과연 ‘전체’는 누구이고 ‘일부’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생겨나게 되었다. 이제 희생해야 하는 ‘일부’는 ‘전체’처럼 많아졌고, 이익을 취한다는 ‘전체’는 사실상 ‘일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지고 있다. 작년 10월 메릴린치 증권사가 발표한 <아시아·태평양 부자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전년 대비 부자 증가율은 세계 1위였다. 인구의 0.22%인 8만 6천명 정도가 백만 불 이상의 자산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한편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추산한 바에 따르면 재작년 한국의 잠재적 빈곤층은 716만 명으로, 전체 인구 6~7명 중에 한 명 꼴로 심각하게 늘었다. 국가의 발전, 국민소득의 향상을 위해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떠들어대지만, 누가 ‘국민’이고 누가 ‘비국민’인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멀쩡히 국가 안에 있으면서 그 국가 안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 ‘국민’이지만 또한 ‘비국민인’ 사람들, 이른바 새로운 형태의 난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작년에 몇몇 농촌에 들렀을 때 농민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던 이야기 중 하나가 ‘우리는 이 나라 국민이 아닌가 보다’였다. 현재 농촌에 대한 정부의 대책에는 뾰족한 게 없다. ‘한미FTA’로 인한 시장의 전면 개방과 구조조정은 불가피하고, 정부로서는 그 피해를 최대한 보상하겠다는 게 고작이다. 오히려 시장 개방을 농촌 경쟁력의 기회로 삼자는 말도 정부 주변에선 심심찮게 나온다. 재작년 발표된 ‘농림어업인 삶의 질 향상 및 농산어촌 지역개발 5개년 기본 계획’에서 정부는 농업의 기계화와 대규모 영농 가구의 증가를 지난 농정의 성과로 꼽고 있다. 농촌의 구조조정에 어느 성도 성공했다는 것이다. 아예 한 발 더 나아가 2013년까지 시장 경쟁력 있는 전업농 20만호를 육성하겠다는 포부까지 밝힌다. 그럼 나머지 백만 농가는 어떻게 될까. 시장경쟁력이 없어 보이는 나머지 농민들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들은 농촌에 살겠지만, 농민으로서가 아니라 ‘빈민’이나 ‘노인’으로서 살 것이다. 한마디로 정부가 인도적 차원에서 보살펴야 하는 ‘난민’이 되는 것이다. 자기 영토 안에서 자기 정부를 잃은 국민들. 바로 이들이 농민이고, 이들이 비정규직이고, 이들이 대다수 국민이다. 오늘날 ‘농촌에서 살아간다’는 말은 ‘농촌에서 죽어간다’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이 말이 언제까지나 농촌에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계속되면 언젠가는 ‘이 나라에서 살아간다’말이 ‘이 나라에서 죽어간다’는 뜻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 6월 <KBS 스페셜> ‘FTA 12년 - 멕시코의 명암’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 되었다. 우리보다 먼저 미국과 FTA를 체결한 멕시코의 상황을 전달하는 것이었는데, 그 방송의 끝부분에 멕시코 농민들의 시위가 나왔다. 거기서 멕시코 농민군 사파티스타의 지도자 마르코스는 정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정부의 입장을 바꾸고자 하는 게 아니라 정부를 전복시킬 것이며, 부자들에게 뭔가를 달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내쫓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이것이 한 사회가 처할 수 있는 가장 큰 위기이다. 정부가 계속해서 대중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민심을 읽는 데 실패할 때, 대중들은 대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더 이상 ‘우리 말을 들어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당신이 우리를 버렸으므로 우리도 당신을 버린다.’고 말한다. 그들은 ‘당신이 우리를 국민으로 대하지 않으므로, 우리도 당신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직은 우리에게 이런 시간이 오지 않았다. 아직은 농민들이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정부에게 호소하고 있고, 아직은 모든 국민들이 함께 살 길을 찾아보자고 말하고 있다. 자신들을 ‘비국민’, ‘난민’ 취급하는 정부에게 아직은 ‘국민’으로서 책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아직’이라는 시간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정부가, 정치인들이 빨리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언젠가 우리 사회에도 난민들의 망명정부가 생겨날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