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아이구 지랄아, 내 무덤 내가 팠네 글｜박창수 그림｜성주삼 그래 잘한다. 그렇게 해야 혀. 언제까지 우리만 당하며 살어야 혀. 안그려유.” “그건 그려. 지들이 우리네 없으면 여태 어디서 돈 벌었겄어. 몇 십년을 대놓고 구매하는데 사료 값 올리는 것은 지들 맘대로, 엿장수 마음대로 하면 안되지” 한국낙농육우협회 청년분과위원회가 사료업체에 사료값 인하를 요구하는 공개질의서를 채택하는 한편, 향후 반응에 따라 항의방문 등 강경대응을 전개한다는 소식이 TV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것들 사료값 내려야 또 얼마나 내리겄어유. 쇼하는 건지도 몰라유. 또 언제 올릴지 모르지유” “그러게 말여. 물 값이 우유 값 보다도 비싼 나라잖어. 참 기가 막혀서. 몸에 안좋은 술값도 올라가고 땅에서 저절로 나오는 물 값도 올라가는데 우유값은 그것도 어쩌다 한번 오르잖어. 우유까지 모조리 비싼 거 수입해다 쳐 먹어봐야 우리 우유 값이 싼 줄을 알거여.” “우리야 이제 젖소를 키우면 몇 년이나 더 키우겄시유. 하지만 아직 젊은 사람들한테는 꼭 필요한 일 이구먼유. 아니면 아예 우리네가 주도해서 사료를 공동구매 하던지 사료제조회사를 설립하던지 해야 한다니까유. 어찌됐든 우리 낙농청년들이 앞장서서 제도개선에 나서야 한다구유” “젊은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하겄지. 이제 그만 잠이나 자자구” “저기 있잖어유. 우리 심심한데 화투나 칠래유.” “참, 나 살다 살다 별 일을 다보네. 무슨 식구끼리 화투를 치자구 그려. 나이 들더니 당신도 많이 변했구먼” “아니 십원짜리 동전 가지구 화투 치는 게 뭐 잘못됐시유. 우리 친구 점순이네는 신랑하구 둘이서 허구헌날 친다더구먼. 나이 들어가면서 뭐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당신이 촌스러운 거유. 알기나 혀유” 솔직히 민자씨는 자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예전과는 달리 갈수록 잠이 줄어드는데다 하루 세 번 밥상 차리는 것도 귀찮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아졌고, 친구들 중 누가 자식들한테 용돈 받아서 여행 갔다 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부럽기도 했다. 사실 몇년 전 까지만해도 서울에 있는 여고 동창 몇몇이 모이면 저녁내기 고스톱을 친다는 말을 듣고 ‘팔자 좋은 년들 헛지랄 하네’ 라며 비난을 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제는 남편과 둘이서 고스톱을 친다는 점순이가 부러울 정도이니 변하긴 변한 것이다. 그러나 본래 자상함 하고는 거리가 먼 남편이니 바람난 여편네처럼 날마다 읍네 동갑계원들 만나러 놀러 다닐 수도 없는데다 그렇다고 동네 여자라고는 오직 한사람인 영식엄마하고 수다 떨며 노는 것도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 참으로 앞날이 걱정스럽기만 한 것이다. 고집불통인 남편은 아마도 앞으로 십년은 족히 목장을 지금 이대로 지켜가길 원할텐데 민자씨의 솔직한 심정은 앞으로 몇 년만 더 하고 이제는 도시로 나가서 편안하게 살고 싶은 쪽이었다. 가뜩이나 이런 상황에서 남편은 사십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이 늘 무뚝뚝한 남자인데다 밤 열시 넘으면 잠자기 바쁜 사람이니 갑갑한 게 사실이었다. 재미로 고스톱이라도 함께 쳐주면서 놀아주면 좋으련만 이미 코를 곯며 자는 남편을 바라보는 민자씨 마음이 얼마나 허전하겠는가? 얼마 전 제사 지내고 남은 정종을 한잔 들이킬까, 아니면 연속극이나 더 볼까. 이런 저런 갈등을 하다가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는데 어디선가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허겁지겁 거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니 달은 휘엉청 밝은데 옆집 영식엄마가 대문 앞 호두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훌쩍거리고 있는 것 이었다. “영식엄마, 이 밤에 여기서 왜 우는 겨. 신랑하고 싸웠어?” “아녀유 . 흑 흑 흑” “왜 그려. 영식 엄마 우는 건 처음보네. 아니 뭔 일여. 그러지 말고 말혀” 울음을 그친 영식엄마 하는 말을 들으니 울음이 나올만도 했다. 그동안 남동생이 친정엄마를 모셨는데 몇 달 후면 남동생네 부부가 애들 교육 때문에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는 거였다. 하지만 칠순이 넘은 친정엄마는 같이 가지 않겠다고 하고, 그렇다면 혼자서 살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여동생이 있지만 먹고 사는 형편이 좀 어려워서 모시기 힘든 상황이고 영식엄마가 모시자니 서울에 시부모가 살고 계신데 누구 하나 아프기라도 하면 외아들인 영식이네가 모셔야 할 입장이어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식 아빠라도 선뜻 나서서 모시자는 얘기를 하면 시부모 모르게라도 당분간 못이기는 척하고 모실수도 있는데 아무말이 없는 거였다. 딸 입장에서는 청상과부가 되어 삼남매 키우느라 고생만 한 홀로된 노모가 말년에 혼자서 전세방 하나 얻어 외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여간 죄스럽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민자씨로서는 영식 엄마의 눈물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을 정도였다. 막내 여동생 같은 영식엄마의 눈물을 보면서 그녀의 가슴도 짠하게 아파왔다. “나도 우리 아부지 혼자 되셨을 때 속 많이 상했어. 남동생이 모셨는데도 이런 저런 얘기 들릴 때 마다 괜히 가슴 아프더라구. 나이 들면 아들하고 살아도 그렇고 혼자 살아도 그렇고 외롭고 슬픈 건 마찬가지인 것 같어. 하지만 딸도 자식이여. 시부모 눈치 너무 보지 말어. 방법을 찾아보면 되지 뭘 그려” “아줌니. 뭔 방법이 있겄시유. 내속만 답답혀유 . 우리 엄마 평생 고생만 했는데 늙어서 자식들한테 호강도 못받고 .....,” 순간 민자씨,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영식엄마.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여. 사실 영식이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직 젊다면서. 60대면 두 분이서 재미있게 사시는 게 훨씬 나. 나중에 더 나이 들면 모시더라두. 일단 친정엄마를 이리로 모셔. 영식이네 방 한칸 남잖어. 남자가 모시는건가, 여자가 모시지. 밥하구 빨래하고 다 여자 차지 아녀. 노인데 드시는 거 얼마나 드신다구. 사위가 그 쌀값도 못대면 말이 돼? 여러 생각 말고 영식아빠한테 대놓고 말혀. 모시겠다구” “그래두 시부모님이 계신데....,” “그 양반들 여기 한번이나 다녀가셨나. 생전 오지도 않더구먼. 뭔 일 있으면 늘 영식이네가 올라가잖어. 내 말 잘 들어. 칠순 노모 혼자 사는 것 가슴 아파서 날마다 눈물 짜지 말구. 여기 내려와서 된장하고 김치에 밥을 먹더라두 혼자서 고기반찬 드시는 것 보다는 좋은 겨. 공기 좋구 물 좋구 안그려” 마음 여린 영식엄마는 시부모가 걸리고 남편 눈치 때문에 선뜻 결정을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민자씨는 영식엄마 귀가 따갑도록 어떻게든 모시라고 충고를 했다. 이튿날 아침 밥을 먹으면서 민자씨는 남편에게 전날 밤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으면서 행여라도 영식아빠 만났을 때 그런 얘기 나오면 혼자된 장모님 모시고 사는 것도 복받을 일이니 모시는 게 좋은 거라고 얘기좀 해주라고 당부했다. 한명이라도 더 영식엄마의 지원군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문제는 마지막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민자씨는 자신도 모르게 “사실 노인네들이야 여기 같이 뱃속 편하고 공기 좋은 데가 또 어디 있겄시유” 라고 말한 거였다. 그러자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왜 그려. 당신은 나이 들어서도 여기 사는 건 싫다면서. 서울이 좋구 아파트가 편하다면서. 아, 본인은 싫은데 왜 남은 끌어들이는겨. 거 참 성격 이상하구먼” “아니 그건....., 나야 이제 육십인데.....,” “이봐요. 오민자씨! 육십이나 칠십 셋이나 거기가 거기 거든유. 자네도 내일 모레면 칠십 된다구유. 남들한테만 시골 좋다구 하지 말구 본인이나 마음 굳히고 편하게 여기서 오래오래 사셔유” 비아냥과 충고가 고루 섞인 남편의 시기적절한 말은 그야말로 그녀를 향한 강펀치 같은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민자씨는 목장 그만두고 서울 올라가고 싶다는 얘기는 앞으로 사는 동안 쉽게 꺼내지 못할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로 민자씨 입에서는 수시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단다. “아이구 지랄아, 내 무덤 내가 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