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도 못 사는 인생인데

글｜박창수  그림｜성주삼

 

 

“아무리 나이 들었다고 해도 사람이 에티켓 이라는 게 있는 거지유 . 저렇게 무식한 남자는 처음 봐.”
“아이구 목장댁이 그냥 참어유. 주책스러워 보이고 짜증도 나지만 촌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이해혀야지”
“그래야지유. 잔치집에 와서 저런 노인네하고 싸울 일 있겄시유. 여하튼 나이 들수록 지킬건 더 확실하게 지키는 매너는 있어야 한다니까유”
“맞아유. 백번 천번 맞는 말이지유. 아 목장댁이야 젊었을 때 서울서 직장도 다니고 그랬다면서유. 그런데 평생 농사일만 해온 칠십 넘은 시골 노인네가 매너니 에티켓이니 이런 거 알겠냐구유. 그래도 인물은 좋네. 체격도 좋구. 혹시 목장댁한테 관심 있어서 그렇게 한건 아닌지 몰라 하하하”
“아이구 그런 말 말어유. 누가 들을까 무섭네”

동갑계원 친정엄마 팔순잔치에 간 민자씨는 뷔페 음식을 이것저것 담다가 그만 처음 보는 남자의 발에 밟히고 말았다. 솥뚜껑만큼 큰 발에 밟혔으니 순간 얼마나 아픈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지만 대부분 읍네 사람들이라 여기 저기 눈에 익은 얼굴들이 여럿 있는데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따질 수도 없었다. 눈을 한번 치켜 뜨는 것으로 넘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더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고개만 꾸벅했고 그 후로도 마치 쫓아다니듯이 민자씨가 움직이는 동선대로 바짝 붙어서 따라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남편이 아내의 뒤를 따라다니듯이. 이 때문에 민자씨 마음이 꽤 언짢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퍼댁은 오히려 마치 청춘남녀가 눈이 맞은 것 만큼이나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어머머 목장댁 저기 좀 봐유. 저 남자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잖아유. 참 별일이네. 아무래도 저 노인네가 목장댁 좋아하나 봐유. 아니면 하필 왜 우리 정면에 앉아서 힐끗힐끗 쳐다보는 거야 .”
“아이구 실없는 소리 하지마유. 가뜩이나 심기 불편한 상황에 자꾸 나 놀리지마유. 다 늙은 노인네가 주책도 없구 양심도 없나 보네유. 나 같았으면 미안해서라도 오히려 눈길을 피하겠네유”
“아이구. 목장댁도 참 까탈스럽기는. 그냥 웃자고 한 얘기유. 일단 뷔페음식 푸짐하니까 잔뜩 먹고 보자구유. 이번에는 우리 해산물이나 가지러 갈래유. 나는 회를 엄청 좋아하는데 회 종류가 많더라구”

민자씨는 수퍼댁의 권유에 못이기는 척 일어섰다. 모처럼만에 입어본 검은 스커트와 브라우스가 세련미를 풍기면서 그녀로 하여금 젊은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듯했다. 굽이 좀 있는 구두를 신었는데도 카페트 때문인지 불편함이 없었고 몸은 자유롭게 움직여졌다. 수퍼댁은 회가 싱싱하다면서 몇 가지 회를 접시에 잔뜩 담았지만 민자씨는 회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서 데친 오징어와 문어를 조금씩 담고 초밥을 몇 개 담으려고 하는데 바로 그때였다. 뒤로 느껴지는 어떤 기운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다보는 순간 하마터면 민자씨는 접시를 떨어뜨릴 뻔 했다. 아까 발을 밟았던 그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아닌가? 한편으로는 수퍼댁의 말처럼 노인네가 작업을 걸어오는 것 같아 불쾌함이 더해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디선가 참 많이 본 듯한 사람 같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민자씨가 누구인가? 그래도 한 미모, 한 성질 하는 여자가 아닌가? 그녀는 요즘애들 말로 엣지있게 상대를 한번 쏘아보고는 고개를 획 돌려 초밥이 셋팅된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엣지가 너무 강했던 것일까. 그녀가 몸을 신속하게 돌리는 순간 목에 걸치고 있던 실크스카프가 그만 바닥으로 떨어진 것 이었다. 한손은 접시를 들고 있는데다 치마를 입었으니 접시를 든체 몸을 구부려서 스카프를 주워야하는 난감한 상황이 된 것이다. 사람은 정신없이 오가니 빨리 줍지 않으면 눈군가 발로 밟아버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릎까지 밖에 안오는 스커트를 입었으니 아주 조심스럽게 쪼그려 앉듯이 하지 않으면 속옷이 드러나면서 망신살이 뻗칠 일인 것이다. 그때 뒤에 있던 그 남자가 잽싸게 허리를 굽혀 스카프를 주워서 민자씨 앞으로 건네주었다. 짧은 몇 초 사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민자씨 역시 너무 당황한 나머지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체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한번 눈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옆으로 지나갔다.
테이블에 앉자 수퍼댁이 다시 떠들어댔다.
“그거 봐 목장댁, 내 생각이 틀림이 없다니까유. 내가 옆에서 다 봤다구유. 스카프 주워주면서 야릇하게 미소를 남기는 그 남자와 긴장해서 어쩔줄 몰라 하는 자기 모습 말여유. 어머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멋진 그레이 로맨스 뭐 그런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니까유. 호 호 호”
“아이구 수퍼댁 그만해유. 누가 듣겠어유. 다 늙어서 로맨스는 뭔 로맨스”
“어머. 목장댁, 저이 좀 봐유. 또 이쪽 쳐다보구 있잖아유”
민자씨는 얼굴을 붉히면서 자신도 모르게 남자가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남자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알 수 없는 전율같은게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가져온 음식을 서둘러 먹고 민자씨는 수퍼댁의 팔을 잡아 끌었다. 미소 짓는 60대 후반의 남자가 있는 한 마음도 몸도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 앞을 나설 때 다른 팔순잔치 노인의 며느리이자 동갑계원인 정육점집 여자가 팔을 잡았다.
“목장댁 왜 이렇게 빨리가요. 어차피 올해는 송년회도 안하기로 했는데 오늘 우리 계원들 다 만난 김에 많이 먹고 같이 놀다가요”
민자씨는 집에 일이 있어서 가야한다면서 잔치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자 정육점집 여자는 갑자기 손바닥을 쳤다.
“맞어. 아이구 내가 깜박했네. 저기 목장댁네 고향사람 있어유. 우리 막내 작은 아버님하고 학교 친구인데 목장댁 안다고 하던데. 서울서 내려오셨어유. 나도 오늘 처음 보는 분인데 인물이 좋더라구. 그런데 중년에 목 수술을 해서 말을 잘 못하더라구. 듣는 건 잘 듣는다던데. 가서 인사나 하지 그래유”
목장댁 여자가 손으로 가리킨 사람은 바로 스카프를 주워준 그 남자였다. 순간 민자씨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게 있었으니 다름 아닌 ‘성근 오빠’ 였다. 한동네 살면서 늘 보기만 하면 ‘ 민자야 넌 미스코리아 감이다’라고 말하면서 예뻐해주던 사람이었다. 여고시절 때였던가 군대에서 휴가 나왔다면서 민자씨를 보자 반가워하던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서울에 직장을 잡고 그러다 결혼을 했으니 서로 만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성근 오빠는 그녀의 가슴속에 늘 미안한 존재로 남아 있던 사람이었다. 휴가 나왔을 때 오빠로부터 연애편지를 받았지만 그녀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도 인물이 좋아서 오빠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여럿 있었지만 민자씨는 한 동네 남자와 사귄다는 자체가 부담이었고 성격이 대쪽 같은 친정아버지가 알면 그야말로 난리가 날 일 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동안 그녀가 발걸음을 떼지 못한 체 성근 오빠를 바라보자 정육점집 여자와 수퍼댁은 가서 인사라도 나누라고 종용했지만 민자씨는 당황스러움과 미안함 때문에 급하게 뷔페를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성근 오빠에 대한 미안함과 반가움, 그리고 안스러움이 뒤범벅이 되어 그녀의 가슴속을 흔들었다. 발을 밟고서도 말을 할 수 없어서 그냥 고개만 떨구었고, 바닥에 떨어진 스카프를 주워주던 사람이 그 옛날 자신을 좋아했던 성근오빠 였던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아직도 오빠는 예전처럼 미소 짓는데,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을까. 100년도 못 사는 인생인데,  내가 독한 년이지. 그려 내가 독한 년 인거여”

 

"끝"